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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아모나스 바나이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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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리아모나스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의 독립 운동가이자 사업가, 언론인이다. 1863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농민의 아들로 자랐으며, 리투아니아 출판 금지 시기 서적 밀수, 문화 단체 활동을 통해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 운동에 참여했다. 카우나스에 인쇄소를 설립하여 리투아니아어 서적과 신문을 발행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리투아니아 김나지움을 설립하는 등 교육 활동에도 기여했다. 독립 후에는 정치 활동과 사업을 병행하며,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연합을 결성하고 신용 협동조합, 해운 회사를 설립했으나, 사업 실패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33년 사망했으며, 리투아니아 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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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아모나스 바나이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살리아모나스 바나이티스 초상화 (1928년)
1928년 바나이티스의 초상화
출생일1866년 7월 15일
출생지바이에티에쿠피아이, 아우구스토프 현, 폴란드 의회
사망일1933년 5월 4일 (66세)
사망지카우나스, 리투아니아
안장지페트라슈나이 공동묘지
국적리투아니아
직업농부, 출판업자, 은행가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4명의 아들 (카지미에라스 빅토라스 포함)과 1명의 딸
친척처남 사제 유스티나스 프라나이티스
경력
활동 기간정보 없음
소속 정당리투아니아 기독교 민주당, 리투아니아 농민 경제 정치 연합
소속 위원회정보 없음
알려진 업적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서 서명자
주요 작품정보 없음
모교정보 없음
수상
훈장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 훈장

2. 초기 생애와 교육

살리아모나스 바나이티스는 신타우타이 초등학교와 마리얌폴레 김나지움에서 수학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00~190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부기 강좌를 수강한 후, 리투아니아에서 낙농업 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5년 빌뉴스 대 세이마스에 참석했다.

2. 1. 출생과 가정 환경

살리아모나스 바나이티스는 콩그레스 폴란드 아우구스토프 현 샤키 지역의 Vaitiekupiai|Vaitiekupiailt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쪽 조상들은 프랑스 출신으로 1830년까지 동프로이센에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1863년 1월 봉기에 참여했다. 그의 아버지는 리투아니아 농부였으며, 바나이티스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 그는 3년 동안 신타우타이의 초등학교에 다녔다. 1879년, 그는 마리얌폴레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그의 동급생은 미래의 리투아니아 대통령인 카지스 그리니우스였다. 김나지움 입학 시험 튜터는 사제였던 Antanas Radušis|Antanas Radušislt였는데, 그는 바나이티스에게 리투아니아 출판 금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1883년, 바나이티스는 형이 사망하고 어머니가 71ha 농장에서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바나이티스는 교육을 마치지 못했고,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서명자 20명 중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1890년, 바나이티스는 사제 유스티나스 프라나이티스와 오르간 연주자 Petras Juozas Pranaitis|Petras Juozas Pranaitislt의 누나인 마리요나와 결혼했다. 그들은 딸 하나와 아들 넷, 총 다섯 자녀를 두었다. 아들 카지미에라스 빅토라스 바나이티스 (1896–1963)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아들 브로니우스 (1898–1967)는 다름슈타트 공과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엔지니어가 되었다. 아들 비타우타스 (1900–1980)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0년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점령 이후 가족 중 유일하게 리투아니아에 남았다.

2. 2. 학업과 중단

바나이티스는 마리얌폴레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미래의 리투아니아 대통령인 카지스 그리니우스와 동급생이 되었다. 김나지움 입학 시험 튜터는 사제였던 Antanas Radušis|안타나스 라두시스lt였는데, 그는 바나이티스에게 리투아니아 출판 금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1883년, 바나이티스는 형이 사망하고 어머니가 71ha 농장에서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바나이티스는 교육을 마치지 못했고,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서명자 20명 중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2. 3. 결혼과 자녀

1890년, 바나이티스는 사제 유스티나스 프라나이티스와 오르간 연주자 Petras Juozas Pranaitislt의 누나인 마리요나와 결혼했다. 슬하에 딸 하나와 아들 넷, 총 다섯 자녀를 두었다. 장남 카지미에라스 빅토라스 바나이티스 (1896–1963)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차남 브로니우스 (1898–1967)는 다름슈타트 공과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엔지니어가 되었다. 삼남 비타우타스 (1900–1980)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0년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점령 이후 가족 중 유일하게 리투아니아에 남았다.

3.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 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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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쇄소 설립과 운영

1914년 그의 인쇄소 직원들과 함께 있는 바나이티스


살리아모나스 바나이티스는 인쇄소 설립과 운영을 통해 리투아니아의 문화와 독립에 기여했다. 리투아니아 출판 금지령 해제 이후 인쇄소를 설립하여,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리투아니아어 서적과 정기 간행물 출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 카지미르 협회와 협력하여 리투아니아어 성경 번역을 출판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점령 하에서도 활동을 이어갔으며, 반독일 선언문을 인쇄하는 등 저항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18년 11월 1일, 그의 인쇄소는 성 카지미르 협회에 25000Rbl에 매각될 때까지 리투아니아의 출판 및 독립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4. 1. 인쇄소 설립 허가와 초기 어려움

리투아니아 출판 금지령이 해제되자 바나이티스는 국민 교육부에 카우나스에 리투아니아 인쇄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허가를 신청했다. 허가는 발급되었지만 당국은 친러시아 신문인 《리투보스 바르사스》(Lietuvos balsas, 리투아니아의 목소리)를 인쇄할 것을 요구했다. 1906년 1월 19일에 첫 호가 발행되었지만, 바나이티스의 방해로 인해 32호 만에 폐간되었다. 초창기에는 장비 부족(최초 구입은 수동 쾨니히 & 바우어 인쇄기)과 자격을 갖춘 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바나이티스는 바이트에쿠피아이의 농지를 저당 잡혔다. 1914년까지 인쇄소는 직원 30명과 인쇄기 4대를 갖춘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양질의 장비와 활자 부족으로 출판물의 인쇄 품질은 낮았다.

4. 2. 성 카지미르 협회와의 협력과 출판 활동



바나이티스 인쇄소는 성 카지미르 협회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주요 프로젝트는 율법에서 유오자파스 스크비레츠카스가 번역한 리투아니아어 성경 번역 전체를 출판하는 것이었다. 신약의 첫 부분(네 개의 복음서사도행전)은 1906년에 이미 출판되었다. 총 6권이 1911년부터 1937년까지 출판되었으며, 처음 두 권은 바나이티스의 소유 하에 출판되었다.

1907년, 그는 러일 전쟁 이후 일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반영하여 러시아어에서 7개의 일본 동화를 번역하여 출판했다. 10년 동안 이 인쇄소는 총 130만 부가 발행된 약 300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 중 일부는 1905년에 좋은 고해에 관한 13페이지 분량의 소책자(각 3코페이카에 50,000부 판매)와 1910년에 농부 달력(각 3코페이카에 75,000부 판매)과 같이 수천 부가 인쇄된 작고 저렴한 소책자였다.

1905년과 1918년 사이에 이 인쇄소는 리투아니아어 서적 358권, 러시아어 서적 34권, 폴란드어 서적 5권, 라틴어 서적 1권을 출판했다. 이 인쇄소는 또한 리투아니아 신문 《가르니스》(Garnys), 《비엔세디스》(Viensėdis)와 잡지 《아테이티스》(Ateitis), 《바즈니티네 아프졸가》(Bažnytinė apžvalga), 《드라우기야》(Draugija), 《리투바이트》(Lietuvaitė), 《리투보스 모크이클라》(Lietuvos mokykla), 《네데일디오 스카이티마스》(Nedėldienio skaitymas), 《비에니베》(Vienybė)를 인쇄했다.

4. 3. 제1차 세계 대전 중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중 바나이티스는 러시아로 피난하지 않고 카우나스에서 계속 일했다. 1915년 여름 독일군이 카우나스를 점령했을 때, 바나이티스는 《카우노 지니오스(Kauno žinios, 카우나스 뉴스)》를 발행했다. 이것은 전선과 도시의 상황에 대한 간단한 뉴스레터 형식의 간행물이었다. 바나이티스는 이 신문을 리투아니아어로만 발행하고 싶었지만, 오베르 오스트 관계자는 이를 독일어폴란드어로 번역할 것을 주장했다. 이 신문은 1915년 말에 폐간되었다. 바나이티스는 다른 리투아니아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고 싶었지만, 독일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 후 바나이티스는 비밀리에 반독일 선언문을 인쇄했다. 독일군에게 발견되자, 두 명의 직원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바나이티스는 두 달 만에 그들의 석방을 확보했다. 1918년 11월 1일, 바나이티스는 자신의 인쇄소를 성 카지미르 협회에 25000Rbl에 매각했다.

5. 제1차 세계 대전 중 활동

1915년 12월 15일, 바나이티스는 요나스 크리아우치우나스, 아도마스 약슈타스 등과 함께 미래 리투아니아 국가의 헌법을 제안하는 선언문 800부를 자신의 인쇄소에서 인쇄했다. 이 선언문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역사적 전통에 따라 대공과 양원제 의회가 통치하는 리투아니아-벨라루스-라트비아 연방을 구상했다. 이 계획은 보편적인 투표권,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결사의 자유와 같은 민주적 자유와 인권을 보장했지만,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1917년 9월,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기독교 민주당의 일원으로서 빌뉴스 회의에 참석하여 20명으로 구성된 리투아니아 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카우나스에 기반을 두었고 평의회는 빌뉴스에 있었기 때문에 평의회에서 가장 활동적이거나 영향력 있는 구성원은 아니었다. 1918년 1월 15일,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경찰과 군대를 창설하기 위한 3인 위원회에 임명되었지만, 독일 행정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평의회가 리투아니아가 입헌군주제가 될지 민주 공화국이 될지를 논의했을 때, 바나이티스는 군주제를 지지했다. 1918년 2월 16일, 그는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서에 요나스 바사나비치우스 다음으로 두 번째로 서명했다.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서명하고 소련 러시아가 서부 공세를 시작하여 리투아니아-소비에트 전쟁이 발발하자,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군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목표는 카우나스에서 2,000명의 지원병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1919년 몇 달 동안 그는 샤키아이 지역의 지사로 활동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지방 행정을 조직하고 리투아니아군에 120명의 남성을 모집했으며, 그의 네 아들도 군대에 지원했다.

5. 1. 문화 및 교육 활동

1904년에 바나이티스는 음악 및 연극 공연을 조직하는 다이나 협회에 가입했다. 1915년,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전쟁 희생자 구호 협회의 카우나스 지부를 조직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초,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김나지움(현재의 아우슈라 김나지움) 설립 허가를 받았다. 리투아니아 협회의 재정적 도움과 교육 사울레 협회의 자원을 통해 바나이티스는 부지 확보, 물품 조달, 학생 및 교사 모집 등 새로운 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1915년 말, 약 60명의 학생으로 학교가 개교했다. 바나이티스의 아들 브로니우스는 이 학교 학생으로 1919년 봄에 졸업했으며, 다른 아들 카지미에라스 빅토라스는 최초의 교사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사울레 협회가 학교 행정을 인수했고, 바나이티스는 12개의 초등학교를 추가로 설립하여 감독관을 맡았다. 1915년 말, 그는 4개월 과정의 회계 강좌를 개설하여 20명의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1915년 겨울, 전쟁으로 언론 업무가 한가해지자 바나이티스는 Skriaudžiai|스크리아우자이lt 출신의 저명한 칸클레스 연주자 프라나스 푸스쿠니기스를 고용하여 자신의 언론사 직원들로 구성된 칸클레스 앙상블을 창단하고 지휘를 맡겼다. 이 앙상블은 1915년 말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1916년 1월 5일에는 사울레 김나지움 학생 합창단(바나이티스의 아들 카지미에라스 빅토라스가 지휘)과 함께 카우나스 시립 극장에서 합동 콘서트를 열었다. 앙상블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도 공연 초청을 받았다. 1925년 칸클레스 연주자 협회가 조직되었을 때, 푸스쿠니기스와 바나이티스는 공동 설립자로 참여했다.

5. 2. 칸클레스 앙상블 설립

1915년 겨울, 전쟁으로 주문이 거의 없어 언론은 대부분 한가했다. 바나이티스는 Skriaudžiai|스크랴우자이lt 출신의 유명한 칸클레스 연주자 프라나스 푸스쿠니기스를 고용하여 그의 언론 노동자들로 구성된 칸클레스 앙상블을 설립하고 이끌도록 결정했다. 앙상블은 1915년 말에 공연을 시작했다. 사울레 김나지움의 학생 합창단(바나이티스의 아들이자 미래의 작곡가인 카지미에라스 빅토라스가 이끌었음)과 함께 1916년 1월 5일 카우나스 시립 극장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도 공연 초청을 받았다. 1925년 칸클레스 연주자 협회가 조직되었을 때, 푸스쿠니기스와 바나이티스는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이었다.

5. 3. 정치 활동

1915년 12월 15일, 바나이티스는 요나스 크리아우치우나스, 아도마스 약슈타스 등과 함께 미래 리투아니아 국가의 헌법을 제안하는 선언문 800부를 자신의 인쇄소에서 인쇄했다. 이 선언문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역사적 전통에 따라 대공과 양원제 의회가 통치하는 리투아니아-벨라루스-라트비아 연방을 구상했다. 이 계획은 보편적인 투표권,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결사의 자유와 같은 민주적 자유와 인권을 보장했지만,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1917년 9월,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기독교 민주당의 일원으로서 빌뉴스 회의에 참석하여 20명으로 구성된 리투아니아 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카우나스에 기반을 두었고 평의회는 빌뉴스에 있었기 때문에 평의회에서 가장 활동적이거나 영향력 있는 구성원은 아니었다. 1918년 1월 15일,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경찰과 군대를 창설하기 위한 3인 위원회에 임명되었지만, 독일 행정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평의회가 리투아니아가 입헌군주제가 될지 민주 공화국이 될지를 논의했을 때, 바나이티스는 군주제를 지지했다. 1918년 2월 16일, 그는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서에 요나스 바사나비치우스 다음으로 두 번째로 서명했다.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서명하고 소련 러시아가 서부 공세를 시작하여 리투아니아-소비에트 전쟁이 발발하자,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군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목표는 카우나스에서 2,000명의 지원병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1919년 몇 달 동안 그는 샤키아이 지역의 지사로 활동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지방 행정을 조직하고 리투아니아군에 120명의 남성을 모집했으며, 그의 네 아들도 군대에 지원했다.

6. 독립 이후 활동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농민 경제 정치 연합을 창립하고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 정당은 우익 정당으로 국가 진보당과 뜻을 같이하여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연합을 결성했다. 1919년 10월에는 당 기관지 ''Žemdirbių balsas''(농민의 목소리)를 편집하고 발행했다.

1920년 4월 리투아니아 제헌 의회 선거에 연합 후보로 참여했지만, 연합은 의석을 획득하지 못했다. 이후 ''Žemdirbių balsas''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는데, 바나이티스는 신문을 통해 독점 반대, 재산 보험 홍보, 농민 은행 설립 아이디어 제시, 집권 정당에 대한 선동 등을 펼쳤다. 그러나 1922년 10월 선거에서 리투아니아 농민 연합이 의석을 얻지 못하면서 신문은 1923년 2월 폐간되었고, 이듬해 당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연합에 합병되었다.

바나이티스는 자신의 서재에 있다(1921년에 출판된 ''리투아니아 앨범''에서)


1928년 2월, 바나이티스는 주간 신문 ''Tautos kelias''(국가의 길)을 창간하며 출판 활동을 재개했다. 이 신문은 1926년 12월 쿠데타를 지지했지만, 곧 편집권을 잃고 1928년 6월 사임했다.

바나이티스는 사업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911년 변호사 안타나스 페트라이티스와 함께 리투아니아 신용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1918년에는 무역 및 산업 은행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회에 선출되었고, 독일로부터 리투아니아 군대를 위한 무기 및 탄약 구매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은행은 부실 경영으로 1927년 파산했다.

1919년에는 리투아니아 해운 회사(Lietuvos laivininkystės bendrovėlt) 설립에 참여하여 부의장을 맡았다. 회사는 네만강발트해에서 여객 및 화물 운송 사업을 펼쳤으나, 발트해 운송 사업은 수익성이 좋지 않아 중단되었다. 1927년에는 남아메리카로 향하는 리투아니아 이민자들을 위한 해운 사업 확장을 시도했지만, 대공황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1931년 사업이 중단되었다.

1927년,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대학교 법학부에서 1년간 강의를 들었다. 1928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 훈장 4등급을 받았다. 카우나스 버스 터미널 이사로 재직하며 터미널 이전 및 신축에 기여했다.

1933년 5월 4일, 바나이티스는 위궤양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안타나스 스메토나 등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는 페트라슈나이 묘지에 안장되었다.

6. 1. 정치 및 언론 활동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농민 경제 정치 연합(Ekonominė bei politinė Lietuvos žemdirbių sąjungalt)을 창립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1919년 4월 28일에 창립 회의가 열렸다. 이 정당은 우익 정당으로, 국가 진보당과 뜻을 같이하여 결국 합당하여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연합을 결성했다. 1919년 5월에는 농민 협회와의 합병 가능성을 잠시 논의하기도 했다. 1919년 10월, 바나이티스는 당 기관지인 ''Žemdirbių balsas''(농민의 목소리)를 편집하고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향인 바이트예쿠피와 인근 신타우타이에 우유 분리기 및 곡물 정제소를 설립했다.

바나이티스는 연합 후보로 1920년 4월 리투아니아 제헌 의회 선거에 참여했지만, 연합은 의석을 얻지 못했다. 선거 결과가 좋지 않아 ''Žemdirbių balsas''의 발행은 1920년 5월부터 1921년 1월까지, 그리고 1921년 2월부터 1922년 1월까지 중단되었다. 발행이 재개되었을 때 바나이티스는 신문을 통해 독점(특히 린넨) 생산에 반대하고, 재산 보험의 이점을 설명하고, 농민 은행 설립 아이디어를 홍보하고, 집권 정당에 대한 선동을 벌였다. 리투아니아 농민 연합이 1922년 10월 선거에서 의석을 얻는 데 실패한 후, 신문은 1923년 2월 5일에 폐간되었다. 이듬해, 당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연합에 합병되었다.

바나이티스는 1928년 2월에 주간 신문 ''Tautos kelias''(국가의 길)을 창간하면서 출판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이 신문은 1926년 12월 쿠데타를 지지하여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연합과 안타나스 스메토나 대통령을 집권시켰다. 그러나 바나이티스는 곧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 총리의 지지자들에게 편집권을 잃었다. 1928년 6월, 바나이티스는 철의 늑대 조직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알기르다스 슬리에소라이티스에게 편집인 자리를 넘겨주고 사임했다.

6. 2. 사업 활동

1911년 10월, 바나이티스는 변호사 안타나스 페트라이티스와 함께 작은 리투아니아 신용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조합원 수는 1915년 1월 70명에서 429명으로 증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청산될 당시 잔액은 554000RUB이었다. 1918년 초,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리투아니아 은행의 필요성을 논의했다. 바나이티스, Martynas Yčas|마르티나스 이차스lt, 유르기스 알렉나 등은 1918년 12월 승인되어 최초의 리투아니아 은행이 된 무역 및 산업 은행을 설립했다. 바나이티스는 이사회에 선출되었고, 독일로부터 리투아니아 군대를 위한 무기와 탄약을 구매하기 위해 300000DEM를 확보했다. 처음에는 은행이 성공하여 리투아니아 정부, 저명한 리투아니아인, 그리고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으로부터 상당한 자본을 모금했다. 그러나 독일 마르크의 초인플레이션, 리투아니아 리타스로의 부적절한 전환, 그리고 전반적인 부실한 관리로 인해 은행은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1927년 9월, 바나이티스는 이사회를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은행 파산을 선언했다.

1919년 2월, 19명의 리투아니아인에 의해 여객 및 화물 운송을 위해 최초의 리투아니아 해운 회사(Lietuvos laivininkystės bendrovėlt)가 설립되었으며, 네만강과 리투아니아의 다른 강을 통해 운송이 이루어졌다. 이후 리투아니아 증기선 회사(Lietuvos garlaivių bendrovėlt)로 알려졌다. 이 회사는 마르티나스 이차스가 의장을 맡았고, 바나이티스는 부의장을 맡았다. 1920년 3월, 이 회사는 Friedrich Krupp Germaniawerft에서 생산한 최초의 동력 해상 선박 ''유라테''와 ''카스티티스''(동화 ''유라테와 카스티티스''에서 이름을 따옴)를 받았다. 그러나 발트해 주변의 화물 운송은 수익성이 없었다. ''카스티티스''는 1925년에 침몰했고, ''유라테''는 1926년에 판매되었다. 강 운송은 더 수익성이 있었다. 이 회사는 ''람비나스''(1912년 키예프에서 건조, 수용 인원 800명), ''라인홀다스''(1912년 엘빙에서 건조, 수용 인원 320명), ''에글레''(1883년 독일에서 건조, 수용 인원 255명), ''굴베''를 포함한 여러 엽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1927년, 바나이티스는 해운 사업을 남아메리카로 향하는 리투아니아 이민자들에게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함부르크 남미 증기선 회사의 사무소를 설립하기 위한 허가를 신청했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1928년 6월에야 승인되었다. 1년 후, 이름을 아메리카로 변경하고 앤트워프에서 운영되는 Lloyd Royal Belgede를 대표했다. 1930년, 대공황으로 인해 Lloyd Royal Belge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벨기에 해운 회사에 인수되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바나이티스에게 다른 선주를 찾아 대표하도록 명령했고, 이를 수행하지 못하자 1931년 3월 아메리카에 대한 허가를 종료했다.

6. 3. 말년

1927년, 바나이티스는 리투아니아 대학교 법학부에서 무등록 자유 학생으로 1년 동안 강의를 들었다. 1928년 5월 15일, 리투아니아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 훈장 4등급을 받았다. 그는 카우나스 버스 터미널 이사로 일했으며, 1932년 초 터미널 이사로 임명된 후에는 터미널을 더 편리한 장소로 이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카우나스 기차역 옆 부지를 매입하고 건설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새로운 터미널은 1935년에 문을 열었다.

바나이티스는 위궤양으로 출혈을 겪었고, 1933년 5월 4일 카우나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동료인 안타나스 스메토나프라나스 도비다이티스가 공개 연설을 했다. 그는 카우나스 구묘지에 묻혔고, 구묘지가 현재의 라미베 공원으로 개조되면서 페트라슈나이 묘지로 이장되었다. 바나이티스는 사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사용한 부채를 남겼다. 가족들은 은행에 의해 경매에 부쳐질 위기에 처한 바이티에쿠피 농장을 구제하기 위해 자금을 모금해야 했다. 이 농장은 1941년에 불탔고, 그 잔해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당국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기초석은 도로를 포장하는 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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